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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 칼럼] 신앙과 깨달음

한국경제투데이 2020-09-07 (월) 13:12 4년전 2258  


요즘 한국 교회들의 행태가 너무나도 상식 밖의 일로(脫路)를 걷고 있는 것 같아서 정통교회의 목사로서 심히 걱정 스러우며 또한 마음이 아프다. 

 

국법(國法)을 어기는 사례는 부지기 수고, 노골적 정종유착(政宗癒着)으로 치정을 혼란케 하며 ,곳곳에 대형(大型)교회가 날로 기업화(企業化) 되어 삯군 목사가 판을치고, 심지어는 기독교가 모든 생명(만물의가치))을 위협하는 코로나(COVID-19)를 양성화 하여 퍼뜨리는데 피상적(皮相的) 논리로 일조하는 괴히한 모습들이 , 정부 방역(防役)에 치명적 위협(韓琦總 總會長의 汚行)을 가하고 있다. 

 

금시(今時) 여러 행위들이 기독교(改新敎-PROTESTANT)가 추구 하고자 하는 “인간 사랑의 본질과는 너무도 동 떨어져 있으며 생전(生前) 예수의 가르침과는 너무나 상반(相反)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듯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행동에 대해 어떤 양심(悔改)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현실이 더욱더 답답할 뿐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처처(處處)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누구나 한번쯤 의문을 가지지 않을수 없다. 여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성경속(內)에 가려진 예배(禮拜)문화의 변천사와 하나님의 인간중심(人乃天) 사상을 많은 사역자(목사,선교사 등)들이 간과(看過)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컨데 말라기(구약) 에서 유대의 바빌론 포로시기(BC586~538) 약70년의 시기를 약소하게 다루고는 있으나, 분명한 것은, 이 과정에서 예배(禮拜)의 형식이 확고하게 하나님의 뜻(예레미아 예언)에 의해서 변화 시켰다는 것이다. 

 

과거 남유다(히드기아왕정)가 바빌론에 의해 멸망하기 전의 유대인의 예배 형태는 성전(聖殿) 안(內)에서 재사장(祭事長) 중심의 예배 형태가 진행되어 왔으나, 남유다가 바빌론에 의해 멸망한 이후, 유다백성의 예배(禮拜) 형태는 완전히 변화였던 것이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셀(왕하24:1~20) 왕의 압정(壓政)하에 유대민족의 70년 포로이동 시기가 진행 되면서 자연 스럽게 예배(禮拜)의 형태가 회당(시나고고)내(內)에서 사제(司祭)중심의 예배(禮拜) 형태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과거 구약(舊約)에서는 하나님께서, 성전 안(內)에서 늘 거했기 때문에 반드시 제사장(祭司長)을 통한 성전 출입의 예배(禮拜)가 이루어 져야만 했지만, 포로 70년의 불가피한 이동생활(디아스포라)의 예배 형태는 자연스럽게 회당(會堂-시나고고)형태로 바뀌면서 하나님 거함도 객체적(客體的) 형태에서 주체적(主體的) 형태로 변하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임제(臨濟)가 언제 어디서든 늘 자신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고 믿고 있었고, 이제는 그 장소 또한 성전(聖殿)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걸 굳게 믿고 있었다.(예레미아서..) 또,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으신 전(성전)에 계시지 아니하나니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느냐...(행7:46~50)이렇게 하느님은 정확히 사람과 ㅣ함께함을 제시하고 있다.

 

마치 싯타르타의 깨닮음 에서 ”事事佛像 處處佛生”(믿는마음만 있으면 부처는 늘 곳곳에 거한다)과 같은 논리와 상응하여 보면 될 것 같다. 이런 장(長)시간의 포로(Captive)시대는 많은 유대 백성들의 신앙(信仰)의 형태를 완전히 바꿔 버렸고,계속해서 페르시아와, 헬라의 제국주의(帝國主義)의 그늘 아래서 문화(Hellenism)와 언어(헬라어), 그리고 도시의 형태(바로크,로코코)도 바뀌면서 예수가 구도하는, 로마시대에 와서는 예수의 첫 번째 개혁이 이루어 지는데,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신실한 신앙고백 아래 베드로의 육체(최초의 교회-이후초대교황)를 성전화 시키는, 대개혁을 했던 것인데, (마태16:18) 이것이 공식적 으로 틀을 갖추어 나가면서 비로소 완전한 주체신앙(主體信仰)이 완성 된다( 이것을 믿는자는 내가네가되고 네가내가 되어 늘 함께하는 ...) 

 

예수 사후에,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로마 캐톡릭의 성전중심의 교황청의 유전적 모순과 불완전한 종교 개혁(루터,캘빙의 개혁)은 지금 이 시간에도 그 후유증과 병폐가 고스란이 남아서, 오늘날 성직자들의 뇌리를 쇠뇌 시키고 시대를 호도하며, 국법(國法)까지 망각할뿐 아니라, 인간 공동체의 합리성(合理性)과 객관성(客觀性)을 잃어 버린체 마치 키(key)잃은 큰 배의 선장 처럼 길을 잃은체 망망대해(茫茫大海)를 표류한 듯 하여 안탑갑기만 할 뿐이다.(요한2:20) 

 

46년에 걸쳐 유대 백성의 파와 땀을 모아 지은 거대한 헤롯의 성전을 바라보며 예수는 “저 성전은 돌위의 돌도 남기지 않고 무너질 것이다, 그다음 그터에 3일만에 나의 성전을 지을 것이다” (요한2:19~21). 이사야 66장:1~2절 에서도 하느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늘이 내 보좌요, 땅이 내 발등상 인데, 너희가 나를 위하여 지을집(성전)이 어디 있으며 내 쉴곳이 어디 있겠느냐”이말은 땅위 거대한 성전(聖殿)에 하느님이 거한는게 아니라, 무형(無形)의 교회인 각자의 육체(肉體)가 곧 교회(에클레시아)란 뜻이며, 여기(육체)에 곧 하나님이 거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에 의해 하나님의 성령(聖靈)이 각자의 육체(肉體)에 임제(臨濟)될 때 비로서 완성된 신앙체계가 성립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진정한 예수의 제자(信者)이고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敬天)이라면 공허(空虛)한 성전(聖殿)에 과연 무엇을 찾으려 애써 발길을 걷겠는가? 그리고 코로나(COVID-19)가 창궐한 이 엄중한 비상 시국에 정부 지침까지 어겨가며 꼭 교회를 찾아 허망(虛妄)한 예배(禮拜)를 행해야 하는가? 

 

과연 살아생전 예수가 죽음을 무릎쓰고 대 개혁(改革)을 행했던 수고 스러움을 어찌 홍모와도 같이 물거품 으로 날려 버릴수 있을까? 이시대 참(眞) 신앙인 이라면 다같이 가슴에 손을 얹고 심히 돌리켜 봐야 할 것이다.

 

개혁목사 : 김 찬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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